Johann Georg Pisendel - Violin Concerto in D major, JunP 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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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2 박종세 작성일18-06-06 11:36 조회2,0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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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Georg Pisendel 요한 게오르그 피젠델 (1687-1755)
Konzert D-dur für Violine, 2 Oboen, 2 Hörner, Fagott, Streicher und Basso Continuo
Concerto for violin, orchestra, and basso continuo in D major
Johann Georg Pisendel - Violin Concerto in D major, JunP I.7
요한 게오르그 피젠델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요한 게오르그 피젠델(Johann Georg Pisendel)은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기악 앙상블로 그 명성이 높은 드레스덴(Dresden) 궁정의 오케스트라를
오랜 기간 동안 이끌었던 독일의 바로크 음악가로서 바이올린 연주자 및
작곡가였다.
그는 18세기 전반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한사람으로서
바로크시대 음악가의 전형이 되었던 인물이다.그는 일생 동안 많은 나라를
대상으로 여행을 했다.
특히 그는 자신이 머물러 있었던 곳이면 어디에서건 음악을 듣고 공부했으며
자신이 들었던 것을 그가 작곡한 음악 안에서 통합 했다.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처럼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다양한 음악 요소들이 혼합된 작품을 구성하엿던 대표적인 작곡가의
하나였다.
그는 1687년 뉘른베르크(Nuremberg) 인근의 작은 마을이었던 카돌츠부르크
(Cadolzburg)에서 태어나 1697년 9세의 나이에 안스바흐(Ansbach) 궁정
예배당의 소년성가대원으로 자신의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지몬 피젠델(Simon Pisendel) 역시 음악가로서
성가대의 지휘자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당시 안스바흐 궁정 예배당에는 음악 감독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비르투오소적인 카스트라토(castrato) 가수로 활동하는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피스토키(Francesco Antonio Pistocchi, 1659-1726)와
함께 궁정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쥬세페 토셀리(Giuseppe Torelli, 1658-1709)가 맡고 있었다.
그는 이 무렵에 쥬세페 토셀리(Giuseppe Torelli)로부터 바이올린을 사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변성기로 인해 성가대에서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자
1703년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합류하였으나 1709년
라이프치히(Leipzig)대학에서 자신의 음악 공부를 촉진하기 위해 드레스덴
(Dresden)을 떠났다.
그는 이때 라이프치히로 가는 도중 바이마르(Weimar)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
(Johann Sebastian Bach)를 만났으며, 라이프치히에서 게오르그 필리프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게오르그 필리프 텔레만에 의해 설립된 학생 콜로기움 무지쿰
(student Collegium musicum)의 열성적인 일원으로 두 사람은 이후 가까운 친구로
교류했다.
1711년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연주 공연을 한 그는 다름슈타트 궁정에서
오케스트라 연주자 직위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이듬해 1712년에는 독일의 가장
뛰어난 앙상블 중의 하나인 드레스덴(Dresden) 궁정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된
그는 자신의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드레스덴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다.
1718년경 그는 요한 다비트 하이니엔(Johann David Heinichen, 1683-1729)에게서
짧은 기간 동안 작곡을 사사하였고 이후 1728년에 그는 드레스덴 궁정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장-밥티스트 볼뤼미에가 사망하자 그의 직무을 인계하고 1730년에는
공식적인 후임자로 악장 직위를 계승했다.
드레스덴(Dresden)에 있는 동안 그는 유럽의 주요한 음악의 중심지역 몇 곳을
방문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졌다. 1714년 프랑스 방문을 시작으로 1715년에
베를린을 방문했고1716년-1717년에 걸친 1년여 동안은 이탈리아에서 머물었다.
특히 베네치아(Venezia)에서는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를 만나게 되지만,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는
곧 그를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후에도 로마와 나폴리
(Napoli)를 방문했으며 1718년에는 비엔나(Vienna에 있었다.
그는 음악가로서의 명성은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그가 지닌 연주 기술보다는 먼저
드레스덴 궁정 오케스트라의 악장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그가 지녔던 이러한
역량은 감탄할 만한 그의 정확성과 완벽함에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 작품의 연주자일
때조차 무엇보다도 원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연주하는 것에 집중했다.
또한 요한 요하임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1773)와 프란츠 벤다
(Franz Benda, 1709-1786) 그리고 요한 코트리프 그라운
(Johann Gottlieb Graun, 1703-1771) 및 칼 하인리히 그라운
(Carl Heinrich Graun, 11704-1759) 형제와 같은 다음 시대의 유명했던 몇몇
대가들의 선생으로서도 영향력을 지녔던 훌륭한 교육자였다.
그의 생애 초기에 요한 다비트 하이니엔(Johann David Heinichen)으로부터 작곡 수업을
받았지만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은 마찰 때문에 조급하게 끝나버렸다.
오늘날 알려진 작곡법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가 살았던 바로크시기에는 매우 다양했다.
그의 친구이자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제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아그리콜라
(Johann Friedrich Agricola, 1720-1774)는
"그는 절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항상 완벽한 작품 이기를 원했다 ...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한 번 이상 개정을 했는데, 오늘날 이러한 그의 조심성은 다소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이러한 조심성은 매우 적은 수의 작품들만이 알려지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라며 그가 작곡가로서 그 자신의 작품에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어쨋거나 그의 작품은 비교적 소량인데 비해 그 음악적 가치는 매우 높으며 현존하는 작품 모두가
기악곡이다. 이들 작품에는 10개의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s)을 비롯하여 오케스트라를
위한 4개의 협주곡과 바이올린을 위한 2개의 소나타(sonatas) 신포니아(Sinfonia) 및
트리오(Trio)를 포함한다.
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극히 과작(寡作)한 작곡가로서 이러한 경향은 자신의 위대한 음악을
완성하는 데 영향이 컸다.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Albinoni, 1671-1751)와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 및 게오르그 필리프
텔레만은 모두 자신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그에게 헌정했으며 그는 당대 독일의 가장 중요한
바이올린 연주자 였고 그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다수의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는 사후에 자신의 작품집 출판에 조력한 얀 디스마스 젤렌카(Jan Dismas Zelenka, 1679-1745)와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1985년 한스 루돌프 융(Hans Rudolf Jung)이 피젠델의 작품을 정리해 출판하면서 JunP와 숫자로 표기한
작품 분류 번호 로 분류되어진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Violin Concerto in D major, JunP I.7)는
1720년부터 1745년 사이 피젠델의 자필 악보로 전해지는 바이올린 솔로와 2대의 오보에,바순, 2대의 호른과
현악 앙상블의 오케스트라와 바로크시대의 독자적인 음악 형식이며 저음 성부를 받쳐주는 곡의 화성적
기반인 저음 현과 건반악기로 이루어진 통주 저음 즉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 편성에 3악장의 곡이며
그가 만년에 바이올린과 통주 저음의 D장조 바이올린 소나타(Violin Sonata in D major)로 편곡했던
그에 협주곡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웹)
Konzert D-dur für Violine, 2 Oboen, 2 Hörner, Fagott, Streicher und Basso Continuo
Concerto for violin, orchestra, and basso continuo in D major
Johann Georg Pisendel - Violin Concerto in D major, JunP I.7
요한 게오르그 피젠델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요한 게오르그 피젠델(Johann Georg Pisendel)은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기악 앙상블로 그 명성이 높은 드레스덴(Dresden) 궁정의 오케스트라를
오랜 기간 동안 이끌었던 독일의 바로크 음악가로서 바이올린 연주자 및
작곡가였다.
그는 18세기 전반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한사람으로서
바로크시대 음악가의 전형이 되었던 인물이다.그는 일생 동안 많은 나라를
대상으로 여행을 했다.
특히 그는 자신이 머물러 있었던 곳이면 어디에서건 음악을 듣고 공부했으며
자신이 들었던 것을 그가 작곡한 음악 안에서 통합 했다.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처럼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다양한 음악 요소들이 혼합된 작품을 구성하엿던 대표적인 작곡가의
하나였다.
그는 1687년 뉘른베르크(Nuremberg) 인근의 작은 마을이었던 카돌츠부르크
(Cadolzburg)에서 태어나 1697년 9세의 나이에 안스바흐(Ansbach) 궁정
예배당의 소년성가대원으로 자신의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지몬 피젠델(Simon Pisendel) 역시 음악가로서
성가대의 지휘자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당시 안스바흐 궁정 예배당에는 음악 감독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비르투오소적인 카스트라토(castrato) 가수로 활동하는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피스토키(Francesco Antonio Pistocchi, 1659-1726)와
함께 궁정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쥬세페 토셀리(Giuseppe Torelli, 1658-1709)가 맡고 있었다.
그는 이 무렵에 쥬세페 토셀리(Giuseppe Torelli)로부터 바이올린을 사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변성기로 인해 성가대에서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자
1703년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합류하였으나 1709년
라이프치히(Leipzig)대학에서 자신의 음악 공부를 촉진하기 위해 드레스덴
(Dresden)을 떠났다.
그는 이때 라이프치히로 가는 도중 바이마르(Weimar)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
(Johann Sebastian Bach)를 만났으며, 라이프치히에서 게오르그 필리프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게오르그 필리프 텔레만에 의해 설립된 학생 콜로기움 무지쿰
(student Collegium musicum)의 열성적인 일원으로 두 사람은 이후 가까운 친구로
교류했다.
1711년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연주 공연을 한 그는 다름슈타트 궁정에서
오케스트라 연주자 직위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이듬해 1712년에는 독일의 가장
뛰어난 앙상블 중의 하나인 드레스덴(Dresden) 궁정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된
그는 자신의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드레스덴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다.
1718년경 그는 요한 다비트 하이니엔(Johann David Heinichen, 1683-1729)에게서
짧은 기간 동안 작곡을 사사하였고 이후 1728년에 그는 드레스덴 궁정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장-밥티스트 볼뤼미에가 사망하자 그의 직무을 인계하고 1730년에는
공식적인 후임자로 악장 직위를 계승했다.
드레스덴(Dresden)에 있는 동안 그는 유럽의 주요한 음악의 중심지역 몇 곳을
방문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졌다. 1714년 프랑스 방문을 시작으로 1715년에
베를린을 방문했고1716년-1717년에 걸친 1년여 동안은 이탈리아에서 머물었다.
특히 베네치아(Venezia)에서는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를 만나게 되지만,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는
곧 그를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후에도 로마와 나폴리
(Napoli)를 방문했으며 1718년에는 비엔나(Vienna에 있었다.
그는 음악가로서의 명성은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그가 지닌 연주 기술보다는 먼저
드레스덴 궁정 오케스트라의 악장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그가 지녔던 이러한
역량은 감탄할 만한 그의 정확성과 완벽함에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 작품의 연주자일
때조차 무엇보다도 원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연주하는 것에 집중했다.
또한 요한 요하임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1773)와 프란츠 벤다
(Franz Benda, 1709-1786) 그리고 요한 코트리프 그라운
(Johann Gottlieb Graun, 1703-1771) 및 칼 하인리히 그라운
(Carl Heinrich Graun, 11704-1759) 형제와 같은 다음 시대의 유명했던 몇몇
대가들의 선생으로서도 영향력을 지녔던 훌륭한 교육자였다.
그의 생애 초기에 요한 다비트 하이니엔(Johann David Heinichen)으로부터 작곡 수업을
받았지만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은 마찰 때문에 조급하게 끝나버렸다.
오늘날 알려진 작곡법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가 살았던 바로크시기에는 매우 다양했다.
그의 친구이자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제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아그리콜라
(Johann Friedrich Agricola, 1720-1774)는
"그는 절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항상 완벽한 작품 이기를 원했다 ...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한 번 이상 개정을 했는데, 오늘날 이러한 그의 조심성은 다소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이러한 조심성은 매우 적은 수의 작품들만이 알려지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라며 그가 작곡가로서 그 자신의 작품에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어쨋거나 그의 작품은 비교적 소량인데 비해 그 음악적 가치는 매우 높으며 현존하는 작품 모두가
기악곡이다. 이들 작품에는 10개의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s)을 비롯하여 오케스트라를
위한 4개의 협주곡과 바이올린을 위한 2개의 소나타(sonatas) 신포니아(Sinfonia) 및
트리오(Trio)를 포함한다.
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극히 과작(寡作)한 작곡가로서 이러한 경향은 자신의 위대한 음악을
완성하는 데 영향이 컸다.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Albinoni, 1671-1751)와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 및 게오르그 필리프
텔레만은 모두 자신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그에게 헌정했으며 그는 당대 독일의 가장 중요한
바이올린 연주자 였고 그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다수의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는 사후에 자신의 작품집 출판에 조력한 얀 디스마스 젤렌카(Jan Dismas Zelenka, 1679-1745)와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1985년 한스 루돌프 융(Hans Rudolf Jung)이 피젠델의 작품을 정리해 출판하면서 JunP와 숫자로 표기한
작품 분류 번호 로 분류되어진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Violin Concerto in D major, JunP I.7)는
1720년부터 1745년 사이 피젠델의 자필 악보로 전해지는 바이올린 솔로와 2대의 오보에,바순, 2대의 호른과
현악 앙상블의 오케스트라와 바로크시대의 독자적인 음악 형식이며 저음 성부를 받쳐주는 곡의 화성적
기반인 저음 현과 건반악기로 이루어진 통주 저음 즉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 편성에 3악장의 곡이며
그가 만년에 바이올린과 통주 저음의 D장조 바이올린 소나타(Violin Sonata in D major)로 편곡했던
그에 협주곡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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