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주회 > 음악감상실 음악감상실
음악감상실

Haydn - Keyboard Concerto No. 11 in D major (Hob. XVIII/11)|교향곡,협주곡.

페이지 정보

작성자 B2 박종세 작성일18-04-27 21:24 조회2,420회 댓글0건

본문

Castle by the River(Schloß am Strom), 1820 by Karl Friedrich Schinkel
강 옆에 성...카를 프리드리히 싱켈(1781-1841)
독일의 천재 건축가이자 화가였으며 독일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완성시킨 주역이었다.





Franz Joseph Haydn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
Concerto per il clavicembalo o fortepiano
Haydn - Keyboard Concerto No. 11 in D major (Hob. XVIII/11)
하이든 - 건반 협주곡 11번 D장조(Hob. XVIII/11)


Haydn - Piano Concerto in D Major Hob. XVIII: II -
Mov. 1/3
1. Vivace
Performed by the Freiburger Barockorchester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Featuring Andreas Staier, pianoforte
안드레아스 슈타이어
Conducted by Gottfried von der Goltz
고트프리트 본 데 골츠



Haydn - Piano Concerto in D Major Hob. XVIII: II -
Mov. 2/3
2. Un poco adagio




Haydn - Piano Concerto in D Major Hob. XVIII: II -
Mov. 3/3
3. Rondo all'Ungarese



Joseph Haydn -
Piano Concerto No. 11 in D major, Hob. XVIII/11 

Mikhail Pletnev 미하일 플레트네프, piano.
Iván Fischer 이반 피셔, conductor.









18세기 후반, 빈 고전파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며 고전주의 기악 형식의 완성에 크게
공헌을 했고 100곡 이상의 교향곡을 작곡해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은 1732년 오스트리아(Austria)와 헝가리(Hungary)의
국경에 위치한 로라우라(Rohrau)는 마을에서 가난한 대장간집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여덟 살 때 빈 소년합창단의 전신인 성 슈테판 소년합창단에 들어갔으며
여기서 소프라노 파트를 맡았는데, 얼마나 목소리가 아름다웠는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여왕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의 목소리를 아낀 성가대장은 하이든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카스트라토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수술을 받기로 한 날 배탈이 나서 수술이 연기되었고, 그동안 아버지의 마음이 변해
카스트라토가 되는 불운을 면할 수 있었다. 그 후 하이든은 변성기를 맞아 합창단에서 나와 10년 동안
프리랜서 음악가로 살았다.난로도 없는 다락방에 기거하며 저녁때가 되면 남의 집 창 밑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했다. 귀족에게 하프시코드를 가르치거나 궁정 실내악단 연주자, 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나
독창자로 활동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갔다. 하지만 이렇게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작곡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인 포르포라(Nicola Porpora, 1686-1768) 밑에 들어가 작곡을 공부했다.


27살이던 1759년, 하이든은 보헤미아의 모르친(Morzin) 백작의 궁정 악장(Kapellmeister)에 취임했으나
백작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어 악단이 해산하면서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1761년, 하이든은 헝가리의 호족 에스테르하지(Esterházy) 후작의 전속 음악가로 고용되었다.
에스테르하지 가는 당시 유럽 최고의 부자였고, 에스테르하지 궁은 베르사유 궁에 필적할 만큼 호화로웠다.
후작은 하이든이 대저택에 단원들과 함께 기거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매일 음악회가 열렸고, 주말에는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하이든은 수시로 후작의 궁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 언제라도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곡을 쓰는 것 외에 연주자를 채용하고, 이들을 교육하고, 악기를 관리하는 일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하이든은 이 모든 일들을 불평 한마디 없이 언제나 성실하게 수행했다. 1779년경부터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에 발맞추어 하이든은 자기 자신의 오페라는
물론, 피치니, 그레트리, 파이지엘로, 치마로사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공연할
작품을 선택하고, 단원과 가수를 연습시키는 일은 하이든의 몫이었다.
 

1780년부터 1790년까지 하이든은 모두 96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1790년 주인인 니콜라우스 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이든은 무려 30년 동안 에스테르하지 가를 위해 봉사했다. 재임 초기에는 일에
얽매여 있었지만, 마지막 10년 동안은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보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유명 작곡가가 된 하이든은 빈, 파리, 런던의 음악 출판업자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았다.
스페인 카디스 성당의 위촉을 받고 쓴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과 파리의 콩세르 드 라 로주 올랭피크의
위촉을 받아 작곡한 〈파리 교향곡〉이 바로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제 그의 음악은 에스테르하지 궁의 한정된 청중을 넘어 유럽 전역의 대중에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출판업자 중에는 하이든의 이름이 상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무명 작곡가의 곡에 그의 이름을
붙여 파는 사람도 있었다.1790년, 그가 오랫동안 섬기던 니콜라우스 후작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물려받은
아들 파울 안톤은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이든의 직책이나 연금은 그대로 유지시켰지만,
음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하이든에게는 이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경제적
안정과 창작의 자유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런던의 흥행사인 요한 페터 잘로몬이 그에게
런던에 가서 연주회를 지휘하는 조건으로 오페라와 교향곡 작곡을 의뢰했다.


오페라 한 편당 300파운드, 교향곡 6곡에 300파운드, 연주회 20회에 200파운드의 보수를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1790년 12월 15일, 하이든은 58세의 나이로 잘로몬을 따라 영국으로 갔다. 1791년 1월부터 1792년 6월까지
런던에 체류하면서 교향곡 93번부터 98번까지 모두 여섯 편을 썼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에스테르하지 궁이나
빈에서의 생활과 완전히 달랐다. 매일같이 온갖 리셉션에 불려다니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1791년
7월에는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영국에서 빈으로 돌아왔을 때, 하이든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가 되어 있었다. 이때 니콜라우스 2세가 제4대 에스테르하지 후작으로 등극했다.


거처를 에스테르하지에서 아이젠슈타트로 옮긴 후작은 할아버지가 조직했던 궁정 악단을 다시 조직하고
하이든을 궁정 악장에 앉혔다. 그에게는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여름에 2, 3개월 동안만
아이젠슈타트에서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빈에서 보낼 수 있었다. 후작은 자기 아내인 마리아 헤르메네길트의
명명축일을 위해 매해 미사곡 한 편을 작곡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하이든은
자유롭게 자기가 쓰고 싶은 곡을 쓸 수 있었다. 후기 현악 4중주 작품들, 오스트리아 국가인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와
〈사계(Die Jahreszeiten)〉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1803년 말, 하이든은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그가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08년 3월 27일 〈천지창조〉가 연주되었을 때였다.
이때 베토벤을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이든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5월 31일, 굼펜도르프 가의 자택에서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전기 기악곡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음악가로서하이든이 구성한 건반, 바이올린, 첼로, 오보에, 호른,
트럼펫 및 신포니아 콘체르탄테(Sinfonia Concertante)등의 다양한 기악을 위한 협주곡작품들에서 오늘날의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s)에 해당하는 하프시코드 또는 포르테 피아노(harpsichord or fortepiano)와
오케스트라 편성의 건반 협주곡(Keyboard Concertos) 작품들은 네덜란드의 음악학자안토니 판 호보켄
(Anthony van Hoboken)이 하이든의 작품들을 작곡한 순서대로 정리한 호보켄 번호 "Hob.XVIII:1"로 분류된
건반 협주곡 C장조(Keyboard Concerto in C major) 부터 "Hob.XVIII:11"의 호보켄 분류번호를 갖는 건반 협주곡
D장조(Keyboard Concerto in D major)까지의 11곡에 건반 협주곡 작품을 남기고 있다.


대략 1756년경부터 17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구성한 건반 협주곡들로 그가 구성하였던 100곡 이상의
교향곡이나 4악장 구성을 원칙으로 하는 하이든이 기틀을 확립한 70여곡의 고전주의 현악 4중주의 작품
수에는 못 미치지는 많지 않은 작품들이지만 오늘날 중요한 하이든의 레퍼토리로 연주된다. 이들 건반
협주곡들에서 1780년에서 1783년사이에 구성한 건반 협주곡 D장조(Keyboard Concerto in D major,
Hob.XVIII:11)는 바로크와 고전시대 사이의 전환기에 널리 사용된 갈랑 양식(galant style) 또는 감정과다양식
(empfindsamer Stil) 까지를 포함하는 미술사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나 음악에서는 미술사의 용어를 적극적으로
전용한 로코코 양식(rococo style)인 갈랑 양식에 3악장제의 곡이며 특히 3악장 헝가리풍 론도
(Rondo all'Ungarese; Hungarian Rondo)는 하나의 론도 주제에 3개의 부차주제가 삽입되어 장조와 단조의
대비가 강조된 피날레 론도가 유명한 11번 건반 협주곡은 1784년 빈의 알타리아 출판사에서
작품번호 op.37로 출판된 하이든에 몇 안되는 건반(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이다.


Keyboard Concerto in D major, Hob.XVIII:11
3 movements
I. Vivace (D major)
II. Un poco Adagio (A major)
III. Rondo all'Ungarese. Allegro assai (D major)
(Solo: harpsichord or piano
Orchestra: 2 oboes, 2 horns (D), strings)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