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주회 > 음악감상실 음악감상실
음악감상실

Górecki, Symphony No.3 'Symphony of Sorrowful Songs' 구레츠키 교향곡 3번 ‘…

페이지 정보

작성자 B2 박종세 작성일18-12-04 12:04 조회2,077회 댓글0건

본문

Górecki, Symphony No.3 'Symphony of Sorrowful Songs'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Henryk Górecki

1933-2010

Dawn Upshaw, soprano

David Zinman, conductor

London Sinfonietta

CTS Studios, London

1991.05

 

D. Zinman/London Sinfonietta - Górecki, Symphony No.3 'Symphony of Sorrowful Songs'


이 곡은 처음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음량으로 시작합니다. 차츰 음량이 커지니 소리가 안 들린다고 볼륨을 너무 높이면 스피커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00:00] 1. Lento - Sostenuto tranquillo ma cantabile - [26:44] 2. Lento e Largo - Tranquillissimo - Cantabillissimo - Dolcissimo legatissimo - [36:30] 3. Lento - Cantabile semplice

 

1991년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서 31주 동안 연속 1위를 차지하고 팝뮤직을 포함한 모든 음악 장르에서 6위에 오르며 단기간에 100만 장 이상 팔린 음반이 있다(우리나라에서도 3만5천 장 넘게 팔렸다). 데이비드 진먼의 지휘로 런던 신포니에타가 연주하고 소프라노 돈 업쇼가 노래한, 헨리크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픈 노래들의 교향곡’을 담은 앨범이다. 이 곡은 한동안 ‘구레츠키 신드롬’을 낳았을 정도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음악이 이처럼 경이적인 판매량을 올린 예는 없다. 무슨 음악이기에 그처럼 날개 돋친 듯 음반이 팔려 나갔을까?

 구레츠키(영어식을 따라 고레츠키라 쓰기도 한다)의 교향곡 3번(흔히 ‘슬픔의 노래’라 한다)은 소프라노 독창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다. 1악장 26분, 2악장 9분, 3악장 17분 등 연주시간이 50분이 넘는 대곡이다. 삶의 근원을 상징하는 모성(母性)을 주제로 하여, 1악장과 3악장은 어머니의 위치에서, 2악장은 아이의 위치에서 노래하는 이 곡은 하나의 모티브가 재현되는 현대적 선법(旋法) 형식의 아주 간단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기본적인 음형을 큰 변화나 전개 없이 각 악장마다 반복시키지만 음형 자체는 반복이 될지라도 악기 편성과, 템포, 강약을 적절히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50분이 넘는 대곡임에도 단조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소프라노 돈 업쇼, 데이비드 진먼 지휘, 런던 신포니에타 연주, 구레츠키 교향곡 3번을 담은 음반.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300여만 장이 팔린 명반으로 꼽힌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폴란드인들을 위한 레퀴엠

이 교향곡은 일종의 레퀴엠(Requiem, 진혼곡)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폴란드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남서독 방송교향악단(Radio-Sinfonieorchester Stuttgart des SWR)의 의뢰로 작곡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느리고 애절하다. 모든 악장마다 '느리게' 연주하라는 렌토(lento)가 표기되어 있다. 구레츠키는 전쟁과 학살의 비통한 심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프라노 독창과 단순한 선율을 도입했다. 한없이 느린 관현악 반주를 뚫고 나오는 소프라노 독창에는 말할 수 없는 비애와 고통이 담겨 있다. 독창은 음산한 구음(口吟)처럼 낮게 깔리다가 서서히 옥타브를 높여 때로는 절규를, 때로는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듯한 천상의 기도 소리를 들려준다. 여기에 단조로운 음을 반복하면서 흐르는 현악기 선율은 마치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숨죽이며 흐느끼는 소리처럼 들려 더욱 애절하다.

콘트라베이스로 시작하는 1악장(너무 저음이라 PC 음향으로는 잘 들리지 않는다)에서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오스트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부른 ‘성모애가(성모 마리아의 슬픈 노래)’가 근저를 이루고 있으며, 2악장에서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게슈타포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힌 18살 소녀가 죽기 전 감옥 벽에 새겨 놓아 어머니에게 전하는 짧은 기도문이다. 3악장에서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는 폴란드 남부 민요로 전쟁에서 잃은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절규에 찬 호소이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는 1976년 폴란드의 실레지아 지방에 있는 소도시 카토비체(Katowice)에서 작곡되어 1977년 4월 프랑스의 루아양 페스티발(Royan Festival)에서 초연되었다.

1악장: 렌토

현의 저음부에서 아주 작은 음량으로 주제가 제시되고 이 주제가 특별한 변화나 발전 없이 일정한 패턴으로 계속 반복된다. 악기들이 하나둘씩 가세하면서 점점 소리가 풍성해지고. 고음부에서도 주제가 나타나면서 대위법적으로 진행하다가 모든 악기들이 일제히 연주하는 클라이맥스로 이어진다. 중반 이후에 소프라노 독창이 ‘애통의 노래’를 부르며 곡은 정점을 향한다. 이 ‘애통의 노래’는 15세기 후반 폴란드의 성십자가 수도원에서 부른 애가(Lamentation)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슬픔(스타바트 마테르)이 담겨 있다. ▶피에트로 페르지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마리아>, 1482, 56x101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나의 아들, 선택되고 사랑받는 아이야

너의 상처를 이 어미에게 나누어주렴.

사랑하는 아들아, 내 언제나 너를 가슴에 품고 있노니

또 언제나 성심으로 너를 섬기노니

너는 이미 나를 떠나고 있지만, 내 가슴에 품은 희망이여

말을 해 보려무나 이 어미가 기뻐하도록.

2악장: 렌토 에 라르고

폴란드 남부 타트라 산맥 기슭에 위치한 자코파네(Zakopane)라는 작은 마을에 2차 세계대전 당시 게슈타포 사령부의 지하 감방이 있었다. 종전 후 지하 감방 3호실 벽에 기도문이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짧은 글귀와 함께 ‘헬레나 반다 부아주시아쿠브나(Helena Wanda Błażusiakówna)’라는 이름과 ‘18살, 1944년 9월 25일부터 수감’이라고 쓰여 있었다. 소프라노 독창이 이 짧은 기도문을 반복해서 부르고 오케스트라는 주로 반주 역할을 하는데, 2악장의 이 소프라노 독창은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의 하이라이트이다.

아, 엄마, 울지 말아요

천상의 정결한 여왕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실 거예요.

아베 마리아

청아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 노래는 이 교향곡이 ‘슬픔의 노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슬픔과 고통을 뛰어넘어 평안과 위로를 안겨주는 이 곡의 미덕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이 저지른 야만과 폭력에 대해 깊이 성찰하라는 작곡가의 의도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현대음악이면서도 듣기에 거북하지 않은 선율과 심금을 울리는 음악적 메시지가 결합됨으로써 그토록 이 곡이 이례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여기에는 데이비드 진먼의 지휘와 소프라노 돈 업쇼의 역할도 한몫했다.

3악장: 렌토

1악장과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라는 같은 음형을 계속 반복하는데,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점층 수법은 나타나지 않는다. 피아노가 타악기 역할을 해주고, 소프라노의 애절한 노래가 등장하는데, 폴란드 남쪽 오폴레(Opole) 지방의 민요로, 전쟁에 나간 아들이 돌아와 쉴 따뜻한 침대를 마련했건만 아들의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가련한 어머니가 울부짖는 내용이다. 가사는 민요답게 정제된 표현보다 비통하고 혼란스러운 화자(어머니)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음악은 슬픔과 분노의 표출보다는 진혼이나 위령에 가까운 정화되고 평온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사를 추려 옮긴다.

사랑하는 아들아, 어디로 갔느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잔인한 적들이 너를 죽였겠지

아, 너희 나쁜 인간들아

신성하신 분 하느님의 이름으로

내게 말해보아라.

왜 죽였느냐 내 아이를

내가 통곡에 통곡을 하여

내 늙은 눈에서 비통의 눈물이 흘러내려

오데트 강이 하나 더 생긴다 하더라도                                         

내 아들은 되살아오지 못하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내 아들 묻힌 곳 알 수 없네

불쌍한 내 아이

차갑고 험한 도랑에 누워 있지는 않으려나

하느님 곁에서 노래하는 너희 새들아

내 아들을 위해 노래해 다오

이 어미는 그 아이를 찾을 수 없구나

하느님 곁에 핀 너희 작은 꽃들아

내 아들 묻힌 곳에 고운 꽃을 피워 주렴

내 아이가 행복하게 잠들 수 있도록

Górecki, Symphony No.3 'Symphony of Sorrowful Songs'

Zofia Kilanowicz, soprano

Antoni Wit, conductor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Concert Hall of the Polish Radio in Katowice

1993.12

 
작가 정찬의 소설 <슬픔의 노래> 속 구레츠키와의 인터뷰

작가 정찬의 소설 <슬픔의 노래>는 1995년에 발표해 그해 제26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구레츠키의 음악 못지않게 정찬의 소설 역시 무겁고 침중하다. 광주의 5월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과거를 영혼의 상처로 앓고 있는 연극배우를 중심으로 세속의 권력과 인간의 악을 향한 욕망, 진정한 선의 의미 등을 성찰하는 것이 주된 줄거리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소설 속에서 화자(話者)인 유 기자와 구레츠키 간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공연예술을 다루는 월간지 유 기자는 인터뷰 겸 취재차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지방 도시 카도비체에 사는 작곡가 구레츠키를 찾아간다. 인터뷰에서 구레츠키는 폴란드의 역사와 자신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에 나오는 세 편의 노래의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정찬은 소설 원작을 희곡으로도 각색하였다. 아래는 그것을 옮긴 것이다. 달리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구레츠키가 교향곡 3번을 작곡하게 된 동기와 음악의 주제를 이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유 기자, 구=구레츠키)



카도비체 음악원. 구레츠키는 1968년부터 이곳에서 강의를 했다.

유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는 소프라노가 부르는 세 개의 노래 속에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모두 폴란드의 슬픈 역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곡의 창작 배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구  여러분들은 폴란드의 슬픔 역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폴란드는 주기적으로 침략당하고 억압받고 학대받았다. 1772년 독일이 폴란드 서쪽을 점령한 후, 1793년 러시아가 동부를, 오스트리아가 남부를 점령했고, 1795년에는 국가 전체가 점령당했다. 1830년경에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1939년 세계 2차 대전이라는 인류의 재앙이 시작된 곳이 바로 폴란드다. 깊고 깊은 슬픔의 강이 언제나 역사 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혹시 폴란드의 뛰어난 연극 연출가 에즈이 그로토프스키를 아는가?

유  조금...

구  한국의 기자가 그로토프스키를 잘 알고 있다니 무척 반갑다. 그가 연출한 대표적 작품 중에 아크로폴리스란 작품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무대는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창작이란, 자유에 대한 사랑의 행위다. 그리고 사랑이란 신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인간은 언제나 사랑의 결핍에 시달렸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로토프스키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통해 이 신성을 추구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곳에 흩어져 있는 게슈타포 수용소를 보며 자랐다. 수용소에 갇힌 어린 소녀가 벽에 새긴 글을 보라. 우는 어머니를 달래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들을 버리지 말라고 기도하고 있다. 또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통절한 슬픔이 서려 있다. 이들의 눈물이 바로 슬픔의 강이다 '슬픔의 노래'는 슬픔의 강이 흐르는 소리라 할 수 있다.

유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고 그 변해 가는 만큼이나 새로운 슬픔들이 인간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슬픔보다 현재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요?

구  흐르는 강을 지울 수 있다면 당신 말이 옳다. 하지만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흐르지 않는 것은 이미 강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강은 현재를 넘어 미래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을 보라.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을 인종의 문제라 생각하는가? 천만에. 그것은 욕망의 비계 덩어리로 숨 쉬고 있는 인간의 문제다. 과거의 슬픔은 곧 현재와 미래의 슬픔이다. 다만, 그 슬픔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유  그렇다면, 그 슬픔의 강가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구  예술가란... 살아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사람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형벌이기도 하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존재한다. 축복과 형벌은 이 빛과 어둠의 관계다. 그런데, 예술가는 축복보다 형벌에 민감한 사람이고 또한 그 형벌을 견뎌야 한다. 단언컨대, 견디지 못하는 자는 예술가가 아니다.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지만,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 강이 있음을 일깨우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다.

유  마지막으로 더 하실 말씀이라도...

구  한때 난 아방가르드의 진창 속에 빠져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 혼돈 속에서 살아왔고 혼돈의 공포에 눈이 멀어 있었다. 다행히 난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점에서 난 행복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빛은 슬픔의 강 너머에 있다. 이제 내가 당신들한테 질문하고 싶다. 슬픔의 강을 어떻게 건너는가?



헨리크 구레츠키

폴란드 출신의 현대음악 작곡가인 헨리크 구레츠키는 클래식 영역이든 대중음악 영역이든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은 현대 클래식 음악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인정받고 있다. 그뿐 아니라 현대의 모든 음악들이 지닌 미래 지향적 요소들을 이론적으로 또 감성적으로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다. 구레츠키는 많은 곡을 쓴 작곡가는 아니다. 그가 주력한 합창음악도 20곡이 채 안 된다. 그러나 그의 곡에서 보이는 압축된 표현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치 정지된 세계로 또는 고요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부천시립합창단은 2014년 3월 27일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 시즌 2’라는 타이틀로 폴란드의 현대 작곡가 구레츠키의 합창곡만을 모아 연주회를 가졌다.

구레츠키는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1933~ ), 루토수아프스키(Witold Lutosławski, 1913-1994)와 더불어 폴란드 현대음악의 트로이카로 불리고 있다. 다른 많은 현대음악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구레츠키도 초기에는 무조음악, 음렬작법 등을 적용한 아방가르드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썼는데, 1969년에 발표한 <칸티쿰 그라두움>(Canticum Graduum, Op.27) 이후 좀 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작법으로 선회했다.

흔히 <칸티쿰 그라두움> 이후의 구레츠키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용어가 뒤따르는데, 미술 용어에서 온 이 미니멀리즘을 음악에서는 곡을 구성하는 최소의 음형을 계속 반복시키거나 같은 음의 지속, 일관된 박자, 일정한 화음 등을 점진적으로 변화를 주면서 전체 음악을 구성하는 작법을 말한다. 구레츠키의 음악은 미니멀리즘의 기법을 많이 참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화성법과 대위법 그리고 통작가곡 기법도 충분히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정리 : 라라와복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