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ughan Williams, Symphony No.5 in D major 본윌리엄스 교향곡 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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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2 박종세 작성일18-11-11 12:55 조회2,3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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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ughan Williams, Symphony No.5 in D major
본윌리엄스 교향곡 5번
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
Andrew Manze, conductor
BBC Scottish Symphony Orchestra
Royal Albert Hall, London
BBC Proms 2012 Prom 46
2012.08.16
Andrew Manze/BBC Scottish SO - Vaughan Williams Symphony No.5 in D major
1904년 10월 영국 모닝 포스트 신문에 영국의 민요에 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에식스 일대의 민속음악 전통이 빈약하다는 걸 꼬집고 있었다. 이 기사를 읽고 당시 34살의 한 작곡가가 반론을 보냈다.
“저는 브렌트우드 근처의 인그레이브에서 방대한 민요를 채집해 왔으며 그곳에서는 ‘옛노래’를 부르고 있는 부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중략) 인그레이브만이 유독 예외적인 마을은 아닐 겁니다. 에식스만이 아니라 영국 전역의 모든 마을에 전통 민요를 발견할 수 있는 광대한 유산이 똑같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주인공이 레이프 본윌리엄스*였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공부한 작곡가는 한 해 전인 1903년부터 영국 민요를 수집하고 있었다. 당초 ‘영국 찬송가의 과거와 현재’를 책으로 펴내자는 제안을 받은 작곡가는 “대략 두 달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받아들였지만 기왕 시작하려면 제대로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결국 2년 정도 소요됐다"고 회상했다.
당시 본윌리엄스는 찬송가와 민요뿐 아니라 뱃노래까지 800여 곡을 채집했고 이 작업을 통해 잠들어 있던 영국의 민속음악을 일깨웠다. 선율이 남아 있지만 노랫말이 사라진 작품은 작사자에게, 거꾸로 가사는 남아 있지만 멜로디는 유실된 곡은 동료 작곡가들에게 창작을 의뢰하면서 복원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훗날 본윌리엄스는 “2년간 이 세상에서 가장 최상의 것과 긴밀하게 교제한 것은 그 어떤 소나타나 푸가보다 훨씬 더 나은 음악교육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버르토크와 졸탄 코다이가 동유럽에서 현장 답사를 거쳐 자신의 작품을 통해 민족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던 시기와도 대략 일치한다. ▶본윌리엄스는 영국 시문학에 곡을 붙여 수많은 성악곡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픔 가운데 상당수가 성악곡이다.
1912년 1월 본윌리엄스는 “작곡가의 양식은 무척 개인적이겠지만 그 개인 역시 한 나라의 구성원이며 가장 위대하고 잘 알려진 예술가들은 가장 국민적인 예술가이기도 했다. 바흐, 셰익스피어, 베르디, 월트 휘트먼은 모두 세계인이고자 했지만 예술적 영감의 출발점은 항상 민족이었다.”는 자신의 음악적 자의식과 지향점을 집약한 내용의 강연을 했다. 이런 작곡가의 생각은 20여 년 뒤인 1935년 <민족음악>이라는 책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른다.
막스 브루흐와 모리스 라벨에게 배우다
본윌리엄스는 18살에 왕립음악원에 들어갔고 23살에 런던 사우스 램버스의 성 바르나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다. 작곡가는 교회 예배에서 반주를 하고 합창단을 훈련시키며 지역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직접 창단하기도 했다. 그에게 음악은 이론적인 문제 이전에 언제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이었다. 본윌리엄스는 영국의 음악적 유산을 충실하게 계승했지만, 필요할 때마다 베를린과 파리 등 영국 바깥으로 유학을 하면서 음악적 지평을 넓혀 갔다.
25살 때인 1897년 애들린 피셔와 결혼한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막스 브루흐를 사사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뒤인 1908년 또다시 “둔탁하고 답답하며 막다른 길에 이르렀고, 프랑스적인 품위가 좋을 것 같다”며 파리로 건너가 모리스 라벨에게 배움을 청했다. 스승 라벨이 오히려 세 살 연하였다. 브루흐와의 만남이 낭만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라벨과의 교유는 본윌리엄스가 목말라했던 체계적 관현악 기법을 흡수하는 계기가 됐다.
라벨과의 만남이 처음부터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본윌리엄스는 첫 레슨에 자신의 작품을 가져갔지만 라벨은 모차르트의 양식에 따라 작은 미뉴에트를 작곡하라는 과제를 내줬다. 본윌리엄스는 “모차르트의 미뉴에트나 쓰려고 내 시간과 작업, 경력을 다 바쳐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런 충돌 덕분에 오히려 세 살 터울의 두 작곡가는 손쉽게 사제이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훗날 본윌리엄스는 “라벨은 선율 대신에 음색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관현악을 쓸 것인지 일러주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예술적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관현악을 통해 자신의 감수성과 문제의식을 풀어 갈 방법론을 얻게 된 것이었다. 라벨은 후에 “내 음악을 쓰지 않은 유일한 나의 제자”라고 본윌리엄스를 평가했다.
1903년부터 구상에 들어갔던 교향곡 1번 ‘바다’가 라벨과의 만남을 거쳐 6년여 만인 1909년에 완성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라벨은 제자의 작품을 프랑스 음악계에 소개하기 위해 애썼고, 본윌리엄스는 스승을 영국에 초청하면서 음악적이고 인간적인 교유를 이어갔다. 라벨은 “나는 파리지앵이지만 런던을 그리워하는 파리지앵”이라는 편지를 제자 본윌리엄스에게 보냈다.
본윌리엄스의 스승이 라벨이었다면, 음악적 동반자는 <행성>의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였다. 본윌리엄스는 2년 연하인 홀스트와 1896년 왕립음악원에서 만난 직후부터 곧바로 절친한 친구가 됐다. 본윌리엄스가 “내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했던 홀스트는 17세기 이후 오랫동안 묻혀 있던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와 <요정 여왕>등을 잇달아 연주하면서 영국 음악의 전통을 재조명했다. 이런 의기투합을 통해 본윌리엄스와 홀스트는 20세기 초반 영국 음악계를 주도하는 주역으로 떠올랐다.
1910년 본윌리엄스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오랜 기간 심혈을 쏟았던 교향곡 1번 ‘바다’가 리즈 페스티벌에서 그해 10월 빛을 본 것이다. 오랫동안 악보 상으로만 존재했던 작품이 실제 소리를 내게 됐고, 본윌리엄스는 초연 직전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할 정도로 초조해했다. 교향곡 ‘바다’ 초연 직전인 9월에는 글로스터의 합창 페스티벌에서 <토머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도 초연되었다. 이 무대에서 함께 선보인 작품이 바로 에드워드 엘가의 <제론티우스의 꿈>이었다. 본윌리엄스의 출세작이 된 이 환상곡에는 작곡가가 채집하고 발굴했던 튜더 왕조 시대 영국 음악의 정취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 왕립의무대원으로 참전했던 본윌리엄스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 모교인 왕립음악원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작곡가는 47살이었다. 1921년에는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로 부임했고 아내의 신병 치료로 1928년 사임할 때까지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등을 연주하며 바흐의 종교음악을 의욕적으로 재조명했다.
당시 바흐 연주는 300명에 이르는 합창단원을 기용해 독일어 가사를 때때로 영어로 바꿔 부르고 하프시코드 대신 피아노를 사용했다. 작곡 당대의 옛 악기와 연주법을 적극적으로 되살리는 ‘시대연주’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낡은 연주법이지만, 본윌리엄스는 타계하기 직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종교곡을 지휘할 만큼 애착을 쏟았다. 영국이 20세기 후반 ‘시대연주’의 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복고적이지만 헌신적으로 바흐에 매달렸던 본윌리엄스의 공이 컸는지 모른다.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다
작곡가는 생전에 엘가를 잇는 영국 음악의 계승자로 추앙받았지만, 엘리자베스 러천스 같은 영국 현대 작곡가들은 ‘쇠똥’ 같은 음악을 끼적거린 것에 불과하다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작곡가이자 비평가인 피터 월록도 본윌리엄스의 교향곡 3번 ‘전원’에 대해 “대문을 쳐다보고 있는 소 같다.”고 평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본윌리엄스는 ‘계승’보다는 ‘단절’의 대상에 가까웠던 셈이다.
반면 작곡가 타계 50주기였던 2008년을 맞아 “본윌리엄스야말로 20세기 영국 작곡가 가운데 가장 재평가가 시급하다”는 전기 작가 스티븐 존슨의 말처럼 긍정적인 재조명 움직임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실제 ‘전원’이라는 표제처럼 평화로운 교향곡 3번 이후에 발표한 교향곡 4번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서 영향을 받아 격렬한 갈등과 분노가 용솟음치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의 5번과 6번이라는 순서가 본윌리엄스에게는 4번과 3번으로 뒤집힌 셈이다. 그 직전 1931년에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은 헝가리의 동시대 작곡가 벨러 버르토크를 사로잡기도 했다.
본윌리엄스는 가장 영국적인 작곡가로 추앙받았고 숱한 종교곡을 남겼지만, 평생 무신론과 불가지론에 기울었다. 또한 젊은 시절 영국식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경도됐지만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42살의 나이로 기꺼이 참전했을 만큼 내면적으로는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재평가 작업에서 흥미로운 언급 가운데 하나가 영국 평론가 리처드 모리슨의 말이다.
“숭배자나 혐오자 모두에게 본윌리엄스는 영국의 역사와 풍경을 상징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영국이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죄책감, 세계적 영향력의 쇠퇴, 정체성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과거 문화를 기념하는 것을 점차 불편하게 여기게 됐다.”
본윌리엄스는 말년의 인터뷰에서 “‘모더니즘이냐 전통적이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가’라는 점”이라고 했다. 70살의 작곡가가 존 버니언의 종교소설 <천로역정>에 바탕을 둔 교향곡 5번을 발표했을 때 모두 ‘백조의 노래’가 될 것이라고 여겼지만, 8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4곡의 교향곡을 더 쏟아냈다. 결국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은 타계 1년 전인 85살 때 완성됐고, 3개월 전에 초연됐으며, 숨을 거둔 후에 녹음됐다. 1952년부터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가 작곡가의 교향곡 전곡을 처음으로 녹음하기 시작하자, 본윌리엄스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조언을 건넸다. 작곡가가 타계한 1958년 8월 26일도 당초 교향곡 9번의 녹음에 들어가기로 예정됐던 날이었다.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있은 85세 생일 축하 콘서트에 입장하는 본윌리엄스와 두 번째 부인 우르슬라 우드, 1957. 첫 번째 부인 애들린 피셔는 관절염으로 오랜 동안 앓다 1951년에 타계했다.
“나는 살면서 줄곧 아마추어적인 기법을 다스리기 위해 싸워 왔다. 지금 그것을 다 마스터했지만 사용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작곡가의 말은 “늙어버린 이제야 목관악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이해하게 된 지금 나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라고 했던 하이든의 겸허한 고백과도 꼭 닮아 있다. 본윌리엄스의 삶과 음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건 다름 아닌 ‘장인 정신’이다.
글 김성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인 사이면 래틀과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다.
출처 : <오늘의 클래식 - 스트라빈스키에서 진은숙까지 현대 작곡가 40인 열전>(김성현 지음, 아트북스, 2010)
Vaughan Williams, Symphony No.5 in D major
Sir Andrew Davis, conductor
hr-Sinfonieorchester (Frankfurt Radio Symphony)
Alte Oper Frankfurt
2016.05.13
*아래 곡 해설은 따로 정리해 넣은 것입니다. _라라와복래
본윌리엄스의 교향곡 5번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6월 24일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작곡은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1938년, 본윌리엄스는 군악대와 합창을 위한 작품 ‘과거 유령의 퇴장’과 ‘옛 망령을 위한 장송 행진곡’을 썼는데, 이 두 곡이 교향곡 5번의 1악장과 2악장에 차용되었다. 또 이 교향곡엔 그가 오페라 <천로역정>에 쓰려고 했던 소재들 가운데 상당 부분을 전용하였다. 특히 3악장 로만차는 <천로역정>의 아름다운 천사의 합창 “그의 슬픔으로 내게 휴식을 주셨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내게 생명을 주셨다”를 주요 주제로 삼고 있다. 교향곡 5번은 본윌리엄스의 이전 오케스트라 규모에 비해 소규모로 편성되었다.
교향곡 5번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작곡된 곡이지만 전쟁 이미지는 전혀 없으며, 넓은 대지를 느끼게 하는 평온함과 전원적이고 민속적인 선율을 곳곳에 배어 있다. 교향곡 5번은 시벨리우스에게 헌정되었는데 그 당시 영국 작곡계에는 시벨리우스 선풍이 불고 있었다. 시벨리우스와 안면도 없던 본윌리엄스는 ‘허락 없이’ 작품을 헌정했고, 본윌리엄스의 교향곡 9곡을 모두 지휘 녹음한 에이드리언 볼트 경이 훗날 시벨리우스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시벨리우스는 볼트 경에게 “스톡홀름에서 본윌리엄스 박사의 교향곡 5번을 들었는데 놀랍도록 훌륭한 작품이어서 나에게 헌정된 것에 깊은 감사와 자랑과 기쁨을 느낀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전했다.
1악장: 전주곡
소나타 형식을 빌렸으나 제2주제를 제1주제에서 따옴으로써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2악장: 스케르초
매우 짧지만 라벨의 관현악법 영향이 짙게 풍기는 악장이다.
3악장: 로만차
오페라 <천로역정> 1막 2장의 ‘아름다운 집’을 첫 번째 주제로 삼고 있다. 시종 감동적이고 사색적인 악장이다.
4악장: 파사칼리아
파사칼리아는 17세기 초 스페인에서 시작된 3박자 형식의 느리고 장중한 춤곡이다. 상성부에서 리듬과 멜로디적인 요소가 제시되는 동안, 베이스에서는 파사칼리아의 정적이고 반복적인 선율이 전개된다.
*Ralph Vaughan Williams를 보통 ‘랠프/랄프 본 윌리엄스’로 표기하는데 ‘레이프 본윌리엄스’로 바로잡습니다. 우선 Vaughan Williams는 하나의 성(姓)입니다. 이는 영국 웨일스 지방에서 쓰는 표기 방식입니다. 이를 ‘양성 쓰기(double-barrelled name)’라 하는데, Moore-Towers처럼 두 성 사이에 하이픈(-)을 넣는 경우와 Vaughan Williams처럼 하이픈 없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Vaughan Williams는 본윌리엄스로 붙여서 표기되는 겁니다. Ralph를 ‘랠프/랄프’가 아닌 ‘레이프’로 읽는 건 연유가 있습니다. 이 또한 웨일스어 특유의 발음 방식인데, 본윌리엄스의 부인 우르술라가 쓴 <레이프 본윌리엄스 전기>(옥스퍼드대학출판부, 1964)에서 “Ralph는 raif[reif]로 발음해야 한다. 본윌리엄스는 다르게 불릴 때마다 매우 화를 내곤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긴 뭐, 이런 사정을 남이 알 리 없으니 ‘랠프/랄프 본 윌리엄스’라 쓴다고 해서 굳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본윌리엄스는 찰스 다윈과도 혈연관계에 있더군요. 그래서 분야는 다르지만 채집하는 걸 좋아했나 봅니다._라라와복래</b단조>
본윌리엄스 교향곡 5번
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
Andrew Manze, conductor
BBC Scottish Symphony Orchestra
Royal Albert Hall, London
BBC Proms 2012 Prom 46
2012.08.16
Andrew Manze/BBC Scottish SO - Vaughan Williams Symphony No.5 in D major
1904년 10월 영국 모닝 포스트 신문에 영국의 민요에 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에식스 일대의 민속음악 전통이 빈약하다는 걸 꼬집고 있었다. 이 기사를 읽고 당시 34살의 한 작곡가가 반론을 보냈다.
“저는 브렌트우드 근처의 인그레이브에서 방대한 민요를 채집해 왔으며 그곳에서는 ‘옛노래’를 부르고 있는 부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중략) 인그레이브만이 유독 예외적인 마을은 아닐 겁니다. 에식스만이 아니라 영국 전역의 모든 마을에 전통 민요를 발견할 수 있는 광대한 유산이 똑같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주인공이 레이프 본윌리엄스*였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공부한 작곡가는 한 해 전인 1903년부터 영국 민요를 수집하고 있었다. 당초 ‘영국 찬송가의 과거와 현재’를 책으로 펴내자는 제안을 받은 작곡가는 “대략 두 달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받아들였지만 기왕 시작하려면 제대로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결국 2년 정도 소요됐다"고 회상했다.
당시 본윌리엄스는 찬송가와 민요뿐 아니라 뱃노래까지 800여 곡을 채집했고 이 작업을 통해 잠들어 있던 영국의 민속음악을 일깨웠다. 선율이 남아 있지만 노랫말이 사라진 작품은 작사자에게, 거꾸로 가사는 남아 있지만 멜로디는 유실된 곡은 동료 작곡가들에게 창작을 의뢰하면서 복원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훗날 본윌리엄스는 “2년간 이 세상에서 가장 최상의 것과 긴밀하게 교제한 것은 그 어떤 소나타나 푸가보다 훨씬 더 나은 음악교육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버르토크와 졸탄 코다이가 동유럽에서 현장 답사를 거쳐 자신의 작품을 통해 민족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던 시기와도 대략 일치한다. ▶본윌리엄스는 영국 시문학에 곡을 붙여 수많은 성악곡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픔 가운데 상당수가 성악곡이다.
1912년 1월 본윌리엄스는 “작곡가의 양식은 무척 개인적이겠지만 그 개인 역시 한 나라의 구성원이며 가장 위대하고 잘 알려진 예술가들은 가장 국민적인 예술가이기도 했다. 바흐, 셰익스피어, 베르디, 월트 휘트먼은 모두 세계인이고자 했지만 예술적 영감의 출발점은 항상 민족이었다.”는 자신의 음악적 자의식과 지향점을 집약한 내용의 강연을 했다. 이런 작곡가의 생각은 20여 년 뒤인 1935년 <민족음악>이라는 책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른다.
막스 브루흐와 모리스 라벨에게 배우다
본윌리엄스는 18살에 왕립음악원에 들어갔고 23살에 런던 사우스 램버스의 성 바르나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다. 작곡가는 교회 예배에서 반주를 하고 합창단을 훈련시키며 지역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직접 창단하기도 했다. 그에게 음악은 이론적인 문제 이전에 언제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이었다. 본윌리엄스는 영국의 음악적 유산을 충실하게 계승했지만, 필요할 때마다 베를린과 파리 등 영국 바깥으로 유학을 하면서 음악적 지평을 넓혀 갔다.
25살 때인 1897년 애들린 피셔와 결혼한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막스 브루흐를 사사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뒤인 1908년 또다시 “둔탁하고 답답하며 막다른 길에 이르렀고, 프랑스적인 품위가 좋을 것 같다”며 파리로 건너가 모리스 라벨에게 배움을 청했다. 스승 라벨이 오히려 세 살 연하였다. 브루흐와의 만남이 낭만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라벨과의 교유는 본윌리엄스가 목말라했던 체계적 관현악 기법을 흡수하는 계기가 됐다.
라벨과의 만남이 처음부터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본윌리엄스는 첫 레슨에 자신의 작품을 가져갔지만 라벨은 모차르트의 양식에 따라 작은 미뉴에트를 작곡하라는 과제를 내줬다. 본윌리엄스는 “모차르트의 미뉴에트나 쓰려고 내 시간과 작업, 경력을 다 바쳐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런 충돌 덕분에 오히려 세 살 터울의 두 작곡가는 손쉽게 사제이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훗날 본윌리엄스는 “라벨은 선율 대신에 음색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관현악을 쓸 것인지 일러주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예술적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관현악을 통해 자신의 감수성과 문제의식을 풀어 갈 방법론을 얻게 된 것이었다. 라벨은 후에 “내 음악을 쓰지 않은 유일한 나의 제자”라고 본윌리엄스를 평가했다.
1903년부터 구상에 들어갔던 교향곡 1번 ‘바다’가 라벨과의 만남을 거쳐 6년여 만인 1909년에 완성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라벨은 제자의 작품을 프랑스 음악계에 소개하기 위해 애썼고, 본윌리엄스는 스승을 영국에 초청하면서 음악적이고 인간적인 교유를 이어갔다. 라벨은 “나는 파리지앵이지만 런던을 그리워하는 파리지앵”이라는 편지를 제자 본윌리엄스에게 보냈다.
본윌리엄스의 스승이 라벨이었다면, 음악적 동반자는 <행성>의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였다. 본윌리엄스는 2년 연하인 홀스트와 1896년 왕립음악원에서 만난 직후부터 곧바로 절친한 친구가 됐다. 본윌리엄스가 “내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했던 홀스트는 17세기 이후 오랫동안 묻혀 있던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와 <요정 여왕>등을 잇달아 연주하면서 영국 음악의 전통을 재조명했다. 이런 의기투합을 통해 본윌리엄스와 홀스트는 20세기 초반 영국 음악계를 주도하는 주역으로 떠올랐다.
1910년 본윌리엄스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오랜 기간 심혈을 쏟았던 교향곡 1번 ‘바다’가 리즈 페스티벌에서 그해 10월 빛을 본 것이다. 오랫동안 악보 상으로만 존재했던 작품이 실제 소리를 내게 됐고, 본윌리엄스는 초연 직전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할 정도로 초조해했다. 교향곡 ‘바다’ 초연 직전인 9월에는 글로스터의 합창 페스티벌에서 <토머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도 초연되었다. 이 무대에서 함께 선보인 작품이 바로 에드워드 엘가의 <제론티우스의 꿈>이었다. 본윌리엄스의 출세작이 된 이 환상곡에는 작곡가가 채집하고 발굴했던 튜더 왕조 시대 영국 음악의 정취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 왕립의무대원으로 참전했던 본윌리엄스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 모교인 왕립음악원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작곡가는 47살이었다. 1921년에는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로 부임했고 아내의 신병 치료로 1928년 사임할 때까지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등을 연주하며 바흐의 종교음악을 의욕적으로 재조명했다.
당시 바흐 연주는 300명에 이르는 합창단원을 기용해 독일어 가사를 때때로 영어로 바꿔 부르고 하프시코드 대신 피아노를 사용했다. 작곡 당대의 옛 악기와 연주법을 적극적으로 되살리는 ‘시대연주’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낡은 연주법이지만, 본윌리엄스는 타계하기 직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종교곡을 지휘할 만큼 애착을 쏟았다. 영국이 20세기 후반 ‘시대연주’의 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복고적이지만 헌신적으로 바흐에 매달렸던 본윌리엄스의 공이 컸는지 모른다.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다
작곡가는 생전에 엘가를 잇는 영국 음악의 계승자로 추앙받았지만, 엘리자베스 러천스 같은 영국 현대 작곡가들은 ‘쇠똥’ 같은 음악을 끼적거린 것에 불과하다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작곡가이자 비평가인 피터 월록도 본윌리엄스의 교향곡 3번 ‘전원’에 대해 “대문을 쳐다보고 있는 소 같다.”고 평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본윌리엄스는 ‘계승’보다는 ‘단절’의 대상에 가까웠던 셈이다.
반면 작곡가 타계 50주기였던 2008년을 맞아 “본윌리엄스야말로 20세기 영국 작곡가 가운데 가장 재평가가 시급하다”는 전기 작가 스티븐 존슨의 말처럼 긍정적인 재조명 움직임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실제 ‘전원’이라는 표제처럼 평화로운 교향곡 3번 이후에 발표한 교향곡 4번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서 영향을 받아 격렬한 갈등과 분노가 용솟음치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의 5번과 6번이라는 순서가 본윌리엄스에게는 4번과 3번으로 뒤집힌 셈이다. 그 직전 1931년에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은 헝가리의 동시대 작곡가 벨러 버르토크를 사로잡기도 했다.
본윌리엄스는 가장 영국적인 작곡가로 추앙받았고 숱한 종교곡을 남겼지만, 평생 무신론과 불가지론에 기울었다. 또한 젊은 시절 영국식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경도됐지만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42살의 나이로 기꺼이 참전했을 만큼 내면적으로는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재평가 작업에서 흥미로운 언급 가운데 하나가 영국 평론가 리처드 모리슨의 말이다.
“숭배자나 혐오자 모두에게 본윌리엄스는 영국의 역사와 풍경을 상징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영국이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죄책감, 세계적 영향력의 쇠퇴, 정체성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과거 문화를 기념하는 것을 점차 불편하게 여기게 됐다.”
본윌리엄스는 말년의 인터뷰에서 “‘모더니즘이냐 전통적이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가’라는 점”이라고 했다. 70살의 작곡가가 존 버니언의 종교소설 <천로역정>에 바탕을 둔 교향곡 5번을 발표했을 때 모두 ‘백조의 노래’가 될 것이라고 여겼지만, 8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4곡의 교향곡을 더 쏟아냈다. 결국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은 타계 1년 전인 85살 때 완성됐고, 3개월 전에 초연됐으며, 숨을 거둔 후에 녹음됐다. 1952년부터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가 작곡가의 교향곡 전곡을 처음으로 녹음하기 시작하자, 본윌리엄스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조언을 건넸다. 작곡가가 타계한 1958년 8월 26일도 당초 교향곡 9번의 녹음에 들어가기로 예정됐던 날이었다.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있은 85세 생일 축하 콘서트에 입장하는 본윌리엄스와 두 번째 부인 우르슬라 우드, 1957. 첫 번째 부인 애들린 피셔는 관절염으로 오랜 동안 앓다 1951년에 타계했다.
“나는 살면서 줄곧 아마추어적인 기법을 다스리기 위해 싸워 왔다. 지금 그것을 다 마스터했지만 사용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작곡가의 말은 “늙어버린 이제야 목관악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이해하게 된 지금 나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라고 했던 하이든의 겸허한 고백과도 꼭 닮아 있다. 본윌리엄스의 삶과 음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건 다름 아닌 ‘장인 정신’이다.
글 김성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인 사이면 래틀과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다.
출처 : <오늘의 클래식 - 스트라빈스키에서 진은숙까지 현대 작곡가 40인 열전>(김성현 지음, 아트북스, 2010)
Vaughan Williams, Symphony No.5 in D major
Sir Andrew Davis, conductor
hr-Sinfonieorchester (Frankfurt Radio Symphony)
Alte Oper Frankfurt
2016.05.13
*아래 곡 해설은 따로 정리해 넣은 것입니다. _라라와복래
본윌리엄스의 교향곡 5번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6월 24일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작곡은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1938년, 본윌리엄스는 군악대와 합창을 위한 작품 ‘과거 유령의 퇴장’과 ‘옛 망령을 위한 장송 행진곡’을 썼는데, 이 두 곡이 교향곡 5번의 1악장과 2악장에 차용되었다. 또 이 교향곡엔 그가 오페라 <천로역정>에 쓰려고 했던 소재들 가운데 상당 부분을 전용하였다. 특히 3악장 로만차는 <천로역정>의 아름다운 천사의 합창 “그의 슬픔으로 내게 휴식을 주셨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내게 생명을 주셨다”를 주요 주제로 삼고 있다. 교향곡 5번은 본윌리엄스의 이전 오케스트라 규모에 비해 소규모로 편성되었다.
교향곡 5번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작곡된 곡이지만 전쟁 이미지는 전혀 없으며, 넓은 대지를 느끼게 하는 평온함과 전원적이고 민속적인 선율을 곳곳에 배어 있다. 교향곡 5번은 시벨리우스에게 헌정되었는데 그 당시 영국 작곡계에는 시벨리우스 선풍이 불고 있었다. 시벨리우스와 안면도 없던 본윌리엄스는 ‘허락 없이’ 작품을 헌정했고, 본윌리엄스의 교향곡 9곡을 모두 지휘 녹음한 에이드리언 볼트 경이 훗날 시벨리우스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시벨리우스는 볼트 경에게 “스톡홀름에서 본윌리엄스 박사의 교향곡 5번을 들었는데 놀랍도록 훌륭한 작품이어서 나에게 헌정된 것에 깊은 감사와 자랑과 기쁨을 느낀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전했다.
1악장: 전주곡
소나타 형식을 빌렸으나 제2주제를 제1주제에서 따옴으로써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2악장: 스케르초
매우 짧지만 라벨의 관현악법 영향이 짙게 풍기는 악장이다.
3악장: 로만차
오페라 <천로역정> 1막 2장의 ‘아름다운 집’을 첫 번째 주제로 삼고 있다. 시종 감동적이고 사색적인 악장이다.
4악장: 파사칼리아
파사칼리아는 17세기 초 스페인에서 시작된 3박자 형식의 느리고 장중한 춤곡이다. 상성부에서 리듬과 멜로디적인 요소가 제시되는 동안, 베이스에서는 파사칼리아의 정적이고 반복적인 선율이 전개된다.
*Ralph Vaughan Williams를 보통 ‘랠프/랄프 본 윌리엄스’로 표기하는데 ‘레이프 본윌리엄스’로 바로잡습니다. 우선 Vaughan Williams는 하나의 성(姓)입니다. 이는 영국 웨일스 지방에서 쓰는 표기 방식입니다. 이를 ‘양성 쓰기(double-barrelled name)’라 하는데, Moore-Towers처럼 두 성 사이에 하이픈(-)을 넣는 경우와 Vaughan Williams처럼 하이픈 없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Vaughan Williams는 본윌리엄스로 붙여서 표기되는 겁니다. Ralph를 ‘랠프/랄프’가 아닌 ‘레이프’로 읽는 건 연유가 있습니다. 이 또한 웨일스어 특유의 발음 방식인데, 본윌리엄스의 부인 우르술라가 쓴 <레이프 본윌리엄스 전기>(옥스퍼드대학출판부, 1964)에서 “Ralph는 raif[reif]로 발음해야 한다. 본윌리엄스는 다르게 불릴 때마다 매우 화를 내곤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긴 뭐, 이런 사정을 남이 알 리 없으니 ‘랠프/랄프 본 윌리엄스’라 쓴다고 해서 굳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본윌리엄스는 찰스 다윈과도 혈연관계에 있더군요. 그래서 분야는 다르지만 채집하는 걸 좋아했나 봅니다._라라와복래</b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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