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hms,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브람스 교향곡 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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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2 박종세 작성일19-08-10 15:22 조회1,64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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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hms,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브람스 교향곡 4번
Johannes Brahms
1833-1897
Bernard Haitink, conductor
Chamber Orchestra of Europe
BBC Proms 2011 Prom 48
Royal Albert Hall. London
2011.08.20
Bernard Haitink/Chamber Orchestra of Europe - Brahms, Symphony No.4, Op.98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인데, 브람스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아마 이 제목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제목이 이러니 브람스 음악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줄거리는 브람스의 음악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주제는 연상의 여인에 대한 사랑이다. 평생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연모했던 브람스의 사랑도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다. 영화 속에서 젊은이가 여인을 브람스의 작품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초대한 배경에는 브람스의 사랑을 암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말이야 어찌 되었든 이 영화는 끝내 세속적인 결합을 이루지 못했던 브람스와 클라라, 여인과 젊은이의 사랑을 애틋한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게 한다.
음악 그 자체에 승부를 건 브람스
지난 가을부터 나는 완전히 브람스에 빠져 살고 있다. 예전에는 가을이 되면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를 들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어는 틈엔가 브람스가 나의 가을 남자가 되어 있었다. 브람스 음악을 열심히 집중해서 듣는 동안 예전엔 미처 몰랐던 브람스의 매력을 새록새록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 요즘 브람스와 연애하고 있다고. 물론 나는 바흐와 모차르트를 브람스 이상으로 좋아한다. 하지만 이들은 경이와 존경의 대상이지 연모의 대상은 아니다. 인간적인 사랑을 나누기에는 두 천재가 지닌 무게가 너무 버겁다.
브람스의 음악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사나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사나이는 자기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과묵함과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진중함, 어려움을 묵묵히 참아내는 인내심, 자기 욕심보다 상대방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정신적 성숙을 갖춘 사람이다. 나는 브람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의 음악에서 이런 진짜 사나이의 덕목을 읽곤 한다.
젊을 때는 사실 귀에 착 달라붙는 쇼팽이나 차이콥스키의 우울한 멜로디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도 젊어서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낭만에 젖고,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우수에 젖는 것을 즐겼다. 감성의 끝을 살살 긁어주거나 아니면 펑펑 울고 싶을 정도로 짓이겨주는 이런 음악에 비해 브람스의 음악은 너무 진지하고 내성적이어서 듣기에 부담스러웠다. 얄팍한 내 귀가 아주 오랫동안 이 진짜 사나이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브람스는 내밀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브람스는 선배 작곡가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평생 사랑했다.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는 홀로 남은 클라라의 곁을 지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유행가 ‘뜨거운 안녕’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남자답게’ 지켜주었던 브람스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한 남자, 이런 남자를 만나는 것은 나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여자의 꿈이다. 이런 이야기만으로도 브람스는 여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음악은 쇼팽이나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보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왜 그럴까?
브람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는 브람스가 내면에 베토벤 못지않은 열정, 쇼팽 못지않은 로망, 차이콥스키 못지않은 비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이 너무 진지하고 내면적이어서 쉽게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매우 지적으로 처리했다. 그냥 감정에 휘말리는 일 없이, 모든 음에 음악적 필요성과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저 효과만을 위해 무의미한 음을 남발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으며, 감정의 표피를 건드리기 위해 달콤한 멜로디를 쓰지도 않았다.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제목 같은 것도 붙이지 않고 오로지 음악 그 자체에 승부를 걸었다.
요즘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자주 듣는다. 브람스는 모두 네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어떤 사람은 이 네 개의 교향곡을 브람스가 살았던 삶의 궤적과 연결해서 설명한다. 즉, 교향곡 1번은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 작곡가 슈만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교향곡 2번은 클라라에 대한 사랑, 교향곡 3번은 브람스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렇게 브람스 자신과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두루 섭렵한 다음, 교향곡 4번에 이르러 그는 순수 음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어떤 것도 묘사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음악, 음악 그 자체로 승부를 거는 순수예술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교향곡 4번은 네 개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추상적이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브람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위대한 작곡가야. 슈만, 클라라, 그리고 나 자신, 물론 이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이제는 음악 그 자체, 교향곡 자체로 돌아가고 싶어. 베토벤이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라고 하지? 이제 내가 베토벤의 뒤를 이을 거야. 후대 작곡가들에게 교향곡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어.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한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세웠던 전통, 그 고전음악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스산한 가을바람이 느껴지는 교향곡 4번
브람의 교향곡 4번 중에서 나는 특히 1악장을 좋아한다. 이 곡을 통해 브람스는 어떤 것도 묘사하지 않는 순수 음악을 내세웠지만, 웬일인지 나는 1악장의 도입부를 들을 때마다 스산한 가을바람을 느끼곤 한다. 두 음을 레가토로 연결해 놓은 단순한 모티브의 반복 속에 가을바람같이 스산한 고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1악장은 조용히 시작한다. 월요일 아침을 맞은 브람스의 모습과 비슷하다. 가을빛이 완연한 공원 벤치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브람스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는 첼로의 스산한 선율, 도입부에 나온 바이올린 선율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독, 첼로처럼 굵직한 사나이의 고독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브람스는 그저 고독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렇게 제시된 모티브들을 그 후 고도의 테크닉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상적인 모티브를 지적인 작업으로 승화시키는 것, 감정 과잉에서 오는 정서의 피로감을 배제하고 절제되고 고급스러운 정서적 고양을 꾀하는 것, 바로 여기에 작곡가로서 브람스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쇼팽,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베토벤을 거쳐 나의 남성 편력기는 브람스에게로 넘어갔다. 내가 스스로 다가간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고 보니 자연스럽게 브람스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세상에 여러 종류의 음악이 있지만 각각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는 시기는 따로 있는 것 같다. 브람스를 좋아하는 시기는, 인생을 사계절로 치자면 가을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인생의 가을 맞은 사람은 나이 들어 가져다준 안온함 저편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을 느낀다. 그 바람을 맞으며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묻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글 진회숙 이화여대 음대와 서울대 음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월간 <개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을 수상하면서 음악평론가로 등단했다. 젊은 시절에는 KBS 클래식 FM에서 프로그램 진행과 구성을 맡았다.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등이 있다.
브람스 교향곡 4번
Johannes Brahms
1833-1897
Bernard Haitink, conductor
Chamber Orchestra of Europe
BBC Proms 2011 Prom 48
Royal Albert Hall. London
2011.08.20
Bernard Haitink/Chamber Orchestra of Europe - Brahms, Symphony No.4, Op.98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인데, 브람스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아마 이 제목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제목이 이러니 브람스 음악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줄거리는 브람스의 음악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주제는 연상의 여인에 대한 사랑이다. 평생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연모했던 브람스의 사랑도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다. 영화 속에서 젊은이가 여인을 브람스의 작품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초대한 배경에는 브람스의 사랑을 암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말이야 어찌 되었든 이 영화는 끝내 세속적인 결합을 이루지 못했던 브람스와 클라라, 여인과 젊은이의 사랑을 애틋한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게 한다.
음악 그 자체에 승부를 건 브람스
지난 가을부터 나는 완전히 브람스에 빠져 살고 있다. 예전에는 가을이 되면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를 들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어는 틈엔가 브람스가 나의 가을 남자가 되어 있었다. 브람스 음악을 열심히 집중해서 듣는 동안 예전엔 미처 몰랐던 브람스의 매력을 새록새록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 요즘 브람스와 연애하고 있다고. 물론 나는 바흐와 모차르트를 브람스 이상으로 좋아한다. 하지만 이들은 경이와 존경의 대상이지 연모의 대상은 아니다. 인간적인 사랑을 나누기에는 두 천재가 지닌 무게가 너무 버겁다.
브람스의 음악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사나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사나이는 자기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과묵함과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진중함, 어려움을 묵묵히 참아내는 인내심, 자기 욕심보다 상대방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정신적 성숙을 갖춘 사람이다. 나는 브람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의 음악에서 이런 진짜 사나이의 덕목을 읽곤 한다.
젊을 때는 사실 귀에 착 달라붙는 쇼팽이나 차이콥스키의 우울한 멜로디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도 젊어서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낭만에 젖고,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우수에 젖는 것을 즐겼다. 감성의 끝을 살살 긁어주거나 아니면 펑펑 울고 싶을 정도로 짓이겨주는 이런 음악에 비해 브람스의 음악은 너무 진지하고 내성적이어서 듣기에 부담스러웠다. 얄팍한 내 귀가 아주 오랫동안 이 진짜 사나이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브람스는 내밀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브람스는 선배 작곡가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평생 사랑했다.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는 홀로 남은 클라라의 곁을 지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유행가 ‘뜨거운 안녕’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남자답게’ 지켜주었던 브람스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한 남자, 이런 남자를 만나는 것은 나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여자의 꿈이다. 이런 이야기만으로도 브람스는 여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음악은 쇼팽이나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보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왜 그럴까?
브람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는 브람스가 내면에 베토벤 못지않은 열정, 쇼팽 못지않은 로망, 차이콥스키 못지않은 비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이 너무 진지하고 내면적이어서 쉽게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매우 지적으로 처리했다. 그냥 감정에 휘말리는 일 없이, 모든 음에 음악적 필요성과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저 효과만을 위해 무의미한 음을 남발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으며, 감정의 표피를 건드리기 위해 달콤한 멜로디를 쓰지도 않았다.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제목 같은 것도 붙이지 않고 오로지 음악 그 자체에 승부를 걸었다.
요즘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자주 듣는다. 브람스는 모두 네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어떤 사람은 이 네 개의 교향곡을 브람스가 살았던 삶의 궤적과 연결해서 설명한다. 즉, 교향곡 1번은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 작곡가 슈만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교향곡 2번은 클라라에 대한 사랑, 교향곡 3번은 브람스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렇게 브람스 자신과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두루 섭렵한 다음, 교향곡 4번에 이르러 그는 순수 음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어떤 것도 묘사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음악, 음악 그 자체로 승부를 거는 순수예술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교향곡 4번은 네 개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추상적이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브람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위대한 작곡가야. 슈만, 클라라, 그리고 나 자신, 물론 이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이제는 음악 그 자체, 교향곡 자체로 돌아가고 싶어. 베토벤이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라고 하지? 이제 내가 베토벤의 뒤를 이을 거야. 후대 작곡가들에게 교향곡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어.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한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세웠던 전통, 그 고전음악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스산한 가을바람이 느껴지는 교향곡 4번
브람의 교향곡 4번 중에서 나는 특히 1악장을 좋아한다. 이 곡을 통해 브람스는 어떤 것도 묘사하지 않는 순수 음악을 내세웠지만, 웬일인지 나는 1악장의 도입부를 들을 때마다 스산한 가을바람을 느끼곤 한다. 두 음을 레가토로 연결해 놓은 단순한 모티브의 반복 속에 가을바람같이 스산한 고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1악장은 조용히 시작한다. 월요일 아침을 맞은 브람스의 모습과 비슷하다. 가을빛이 완연한 공원 벤치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브람스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는 첼로의 스산한 선율, 도입부에 나온 바이올린 선율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독, 첼로처럼 굵직한 사나이의 고독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브람스는 그저 고독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렇게 제시된 모티브들을 그 후 고도의 테크닉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상적인 모티브를 지적인 작업으로 승화시키는 것, 감정 과잉에서 오는 정서의 피로감을 배제하고 절제되고 고급스러운 정서적 고양을 꾀하는 것, 바로 여기에 작곡가로서 브람스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쇼팽,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베토벤을 거쳐 나의 남성 편력기는 브람스에게로 넘어갔다. 내가 스스로 다가간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고 보니 자연스럽게 브람스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세상에 여러 종류의 음악이 있지만 각각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는 시기는 따로 있는 것 같다. 브람스를 좋아하는 시기는, 인생을 사계절로 치자면 가을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인생의 가을 맞은 사람은 나이 들어 가져다준 안온함 저편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을 느낀다. 그 바람을 맞으며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묻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글 진회숙 이화여대 음대와 서울대 음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월간 <개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을 수상하면서 음악평론가로 등단했다. 젊은 시절에는 KBS 클래식 FM에서 프로그램 진행과 구성을 맡았다.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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